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설월당(雪月堂)

광산김씨 설월당종가(光山金氏 雪月堂宗家)

56.5x163.5x11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설월당(雪月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6.5x163.5x11
  • 건물명 설월당(雪月堂)
  • 공간명 광산김씨 설월당종가(光山金氏 雪月堂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  
r0048_1.jpg
설월당(雪月堂)

설월당(雪月堂)


설월당(雪月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이 학문과 후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정자의 편액이다. ‘설월’에는 눈의 희고 깨끗함과 달의 맑고 밝은 형상을 취해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만년에 김부륜이 관직에서 물러나 정자를 지어 수신할 곳으로 삼자 스승인 이황(李滉)이 직접 해서(楷書)로 글씨를 써서 주었다. 김부륜은 유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가 향교를 중수하여 교육 진흥에 공헌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가산을 털어 향병을 지원하였다.

대형 편액이다. 편액 크기로 미루어 정사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눈 내린 정사에 형광색 달빛이 내려앉은 풍광이 떠오른다. 온 세상을 눈으로 덮고 그 눈을 달빛으로 덮을 기세다. 반듯하다. 굳세고 튼튼함이 장년의 건장함과 씩씩함이 있다. 시작과 마무리에 붓끝을 감추어 내면을 충실히 하였고 균제된 간격에 정갈함이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설월당종가(光山金氏 雪月堂宗家) 소개


설월당이 위치한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 외내, 오천(烏川)이라 하였다.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한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오천리라 하여 예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오천리는 3개 리로 구분되어 있다. 오천 1리는 군자리와 방잠의 일부, 오천 2리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마을이고, 오천 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마을로 되어 있다. 군자리는 근래에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600년 전통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2km 위인 현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들만 이건하였다.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 와룡의 가구, 예안의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과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는 중종 때 명신으로 가문이 융성해지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오천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김연의 아들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김유의 아들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김효로의 외손인 봉화금씨(奉化琴氏)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등의 7인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이다.

설월당의 주인 김부륜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자는 돈서(惇敍)이며 호가 설월당이다. 김유와 순천김씨(順天金氏) 김수홍(金粹洪)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6세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정호(程顥)가 16세의 나이에 주돈이(周敦頤)에게 나아가 도학을 배운 것을 알고 자신도 도를 찾겠다는 지향을 품고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 등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0년(선조 13) 돈녕부봉사에 제수되어 왕명을 받고 정릉(靖陵)의 석역(石役)을 주관하였는데, 그의 근실함에 포상으로 마필(馬匹)을 하사받았다. 1585년(선조 18) 동복현감에 임명되었다. 전임 현감이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이임하면서 그 고장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이제 아주 훌륭한 사또를 맞이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떠났다고 한다. 김부륜은 교학(敎學)을 일으키고자 하여 퇴락한 옛 향교의 터에 건물을 중수하였고, 봉급을 덜어 8백여 권의 서책을 구입했으며,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써 수십 조의 학령을 만들었다. 당시 나주에 김성일(金誠一)과 이발(李潑) 등이 있어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기울여 종질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가 대장으로 있던 향병을 도왔다. 또 감사(監司) 김수(金睟)가 방어의 계책에 대해 묻자 “먼저 사람을 얻어야 할 것이며, 군량을 비축하고 사졸을 아끼며, 장비를 수선하고 형세를 잘 살피고 척후(斥候)를 조심해야 한다.” 등의 내용으로 답했다고 한다. 1593년(선조 26) 봉화현감이 도망간 뒤 가현감이 되어 평안한 마을로 만든 뒤 관직에서 물러나 1594년(선조 27) 오천에 설월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부륜의 초취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순(朴純)의 딸이고, 재취 부인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수민(申壽民)의 딸이다. 신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고, 사위는 최민수(崔民秀), 전경업(全景業), 이찬(李燦)이다. 김부륜의 묘소는 안동 방잠리의 선영에 있다. 저술로 6권 3책의 『설월당집雪月堂集』이 있다.

오천유적지 경내에 있는 주차장에서 안내판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30여m 전방의 산 비탈면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여러 채의 고택이 있다. 계단 위에서 전면을 바라보면 원형 연못을 사이에 두고 2채의 기와가 자리 잡고 있다. 연못의 왼쪽에 있는 것이 광산김씨 재사(齋舍)이며, 오른 쪽에 있는 것이 설월당이다. 설월당은 원래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4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립 후 퇴락하자 1930년 경 중수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자는 흙돌담으로 둘러 쌓여 있고 흙돌담의 전면에 4주문을 내었다. 정자는 1m 높이의 기단 위에 장방형 주추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의 퇴기둥 3개는 원주이다. 공간 구성은 전면 4칸 중 중앙 2칸은 마루를, 그 좌우에는 온돌방을 꾸몄다. 2칸의 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처리하였고, 전면의 각 칸에는 들어열개띠살4분합문을 달아 등자쇠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루와 방이 접하는 좌우의 벽에는 각각 쌍여닫이띠살문을 달았으며, 마루의 뒷면 중방과 하방 사이는 쌍여닫이넌출문을 달았다. 왼쪽과 오른쪽 방의 전면과 측면에는 각각 쌍여닫이띠살문을 달았고, 온돌방의 측면에 아궁이를 내고 뒤쪽에 굴뚝을 내었다. 건물의 전면에는 툇마루를, 측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전면 4칸 중 정자로 올라오는 계단이 설치된 한 칸을 제외한 전면의 툇마루에는 청판에 풍혈이 있는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참고문헌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명현당호』, 안동민속박물관, 2000.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안동민속박물관, 2004.
  • 광산김씨 예안파 숭원회, 『烏川遺蹟地 君子마을과 崇遠閣』, 안동인쇄사, 2001.
  • 권오영, 「오천 7군자의 학문활동과 사상」, 『국학연구』 제3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6.